후대사랑한석윤 -

点击:6616次时间:2015-02-10

후대사랑의 대표적인 실천자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09 16:18:03 ] 클릭: [ ]

— 언론인 아동문학가 청소년교육가 사회활동가 한석윤선생의 보람찬 인생

아이들 부자

프로필

1943년 3월 길림성 훈춘현 태양촌 출생

1967년 8월 연변대학 조선문학학부 졸업

2003년 5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에서 정년퇴직, 재직기간 사장, 총편집, 당조서기 담임, 고급편집, 명예문학박사.

중국소년아동신문간행물협회 부회장(3기 련임), 연변기자협회 부주석(3기 련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2기 련임).

길림성소선대사업위원회 위원(2기 련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부회장(3기 련임).

《아동세계》,《소년아동》,《꽃동산》등 잡지와 한국의 《아동문학》잡지 고문.

동시집 《별과 꽃과 아이와》 등 11권, 아동장편소설 《뒤에서 날아온 총알》 등 번역작품 20여권 출간.

편집작품: 《20세기 조선족아동문학선집》,《당대 중국소년아동신문잡지 100권 정품문고》 등 30여권, 조선과 함께 《연변조선족동시집》 출간, 한국과 함께 《한중아동문학선집》 등 5권 출간.

《연변조선족자치주모범간부상》,《길림성청소년신문우수언론인상》, 제1회로 중국소년아동신문출판계 최고상인 《엽성도상》 수상.

문학상으로는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학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중국번역가협회 문예번역상, 한국계몽아동문학상, 한국방정환문학상, 한국아동문화상 등 30여차 수상.

2002년부터 지금까지 조선족 유명 동시인 시비 6개 세움.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0돐을 맞으며 길림성 연길시 진달래광장에 《자치주 성립 경축의 노래》기념비 세움.

2006년-현재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회장

《주덕해의 이야기》독후감 쓰기 표창대회(2012년)

우리 민족의 청소년들을 위해 혼신을 불태우고있는 지성인 한석윤선생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있다. 한석윤선생에게는 언론인, 아동문학가, 청소년교육가, 사회활동가란 각종 수식어들이 붙는다. 그 련결고리는 바로 우리 민족의 후대들이다. 한선생은 중국조선족청소년사업의 대표인물로서 청소년사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고 한생을 바쳐가고있다.

《민족의 후대를 키워가는 길에서 은행나무처럼 깨끗이 살고 초불처럼 몸과 마음 다하리!》이는 한석윤선생의 좌우명이다. 후날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사훈으로도 된 이 좌우명을 그는 인생의 락으로, 분투목표로 삼고 오늘날까지 후대들을 위한 힘겹고도 보람찬 고행길을 쉼없이 걸어가고있다.

후대들에 대한 한석윤선생의 사랑은 너무나 깊고 넓고 진지하여 그를 알고있는 사람들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필자 역시 그중의 한사람으로서 다년간 그와 함께 사업하면서 그의 드높은 사업심에 깊이 감복되였다. 최근 출판된 중국조선족아동문학가를 론한 첫 단행본작가론인 《6월을 위한 5월의 노래 — 한석윤론》을 감명깊게 읽으면서 한선생에 대해 더 깊은 료해를 할수 있게 되였고 일전에는 또 한선생을 찾아 취재를 하면서 그의 보람찬 인생을 다시 더듬어보게 되였다.

꿈을 키우는 끈질긴 소년

1943년 훈춘 태양촌에서 태여난 한석윤은 두살나는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등에 업혀 외가집마을 중강자촌으로 이사갔다. 중강자촌은 여우나 승냥이는 물론 호랑이까지 마을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심심산골이여서 바깥세상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당시 중강자소학교에는 김기룡이라고 부르는 나젊은 교원이 있었는데 한석윤네 학급 담임을 맡았다. 김선생님은 한달에 한번 정도 현성에 회의하러 갔다올 때면 《소년아동》잡지며 동화책들을 한두권씩 사가지고와 학생들더러 돌려가며 읽도록 하였다. 덕분에 책과 인연을 맺은 한석윤은 책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지식면을 넓혀갈수 있었다.

1984년 연변어린이들에게 제자를 써주는 공청단중앙 서기처 서기 호금도와 함께(왼쪽 공청단연변주위 신봉철서기, 오른쪽 한석윤사장).

아동문학가인 윤정석선생의 《푸른 교실로》 등 동시들을 읊으면서 작품속에 빠져버린 한석윤은 장차 자신도 이런 멋진 동시를 쓰는 아동문학가로 될 꿈을 키우게 되였다.

소학교 5학년때였다. 마을 민병대장으로 있던 외삼촌이 로농간부로 추천되여 외가집식구들은 연길로 이사하게 되였다. 무작정 연길로 따라갔다가 아들을 고생시킬가봐 어머니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있는데 이때 김기룡선생이 선뜻 나서며 글읽기를 좋아하고 작가꿈을 꾸고있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수 있는 연길로 가라고 어머니를 극구 권고하였다.

5학년 후학기에 연길중앙소학교에 들어간 한석윤은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른아침부터 쓰레기무지를 뒤지며 콕스나 파철을 주었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때면 남들의 눈을 피해가며 남새시장에 가 남들이 버린 배추잎을 주어다 국거리를 하였다. 한석윤도 학교에 갖다오면 어머니를 도와 콕스도 줏고 파철도 주으며 쌀되박을 함께 근심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골에서는 볼수 없는 많은 책들을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마음껏 볼수 있어 무엇보다 행복하였다. 점심을 굶던 나날에 한석윤은 점심시간이면 서점으로 달려가 매대앞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매일 책도 사지 않고 읽기만 하는 아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서점일군들은 후에는 어지럽히지만 말고 읽고싶은 책을 마음대로 골라 읽도록 허락해주었다.

《참, 그때 그 서점의 아주머니가 정말 고마웠지요!》 몇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한선생은 그때 서점일군에 대한 고마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다.

한석윤은 돈이 없어 책을 사지는 못해도 서점에서 세계명작들을 닥치는대로 읽으며 문학소양을 키워갔다. 그 보람으로 글짓기를 특히 잘했는데 그가 지은 작문은 번마다 모범작문으로 동학들 앞에서 랑독되였다. 1962년 대학입학시험때는 조선어작문 수험생들중에서 최고점수를 따냈다. 아동문학가로 되려는 꿈을 꾸고있던 그는 대학지망란에도 연변대학 조선어학부 하나만 써넣었다.

포기와 선택

대학교시절에도 한선생은 공부를 열심히 잘해 학과목성적이 우수했고 전교에 몇명밖에 안되는 《주덕해상》수상자로 표창받았다. 그리고 반장도 맡아하면서 활약을 펼쳤다.

1984년 연변주당위 리덕수서기와 함께(왼쪽)

그는 시간만 있으면 고금중외의 아동문학작품들을 탐독하고 부지런히 습작훈련을 하면서 아동문학가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해나갔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는 흑룡강성 북대황부대농장으로 로동단련을 가게 되였고 후날 학교에 돌아와 배치받은 단위는 아동문학에 투신할수 있는 출판사나 신문사가 아니라 연변의약공사였다.

그후 주정부에 전근되여 번역사업에 종사하게 된 한선생은 번역과 과장직무를 맡았는데 해마다 주기관선진사업자로 당선되였다. 그러던 1982년, 그는 이제 40고개를 넘으면 영원히 아동문학가로 되는 꿈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주장이였던 조룡호동지를 찾아가 하고싶은 일을 할수 있게 전근시켜달라고 간곡하게 청들었다.

당시 주정부에서는 한선생을 찾아와 담화하며 그를 주정부판공실 부주임(부시장급)으로 승진시키려 하던차였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정치적으로 크게 발전할수 있는 기회를 놓칠수도 있다면서 재삼 고려해볼것을 권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소중하게 키워온 꿈을 꼭 이루고싶었던 한선생은 그해 3월 승진의 기회를 포기하고 행정급별이 1급 떨어진 과급단위인 연변소년보사의 부총편으로 전근해갔다.

소년보사에 전근해간후 한선생은 인차 당시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였던 조남기동지에게 그 소식을 알리러 갔다. 그때 조남기서기는 《동무 소년보사에 가길 잘했소. 우리 민족을 위해서 누군가는 꼭 소년신문을 잘 꾸려야 하오. 그리고 방법을 대여 연변만이 아닌 전국의 조선족아이들이 소년신문을 볼수 있게 해야 하오. 우리 후대들이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 문자와 문화를 알게 해야 하지》라고 지시했다.

《소년보사에 전근될 때 제 개인적동기는 아동문학꿈을 이루기 위한것이였지요. 그때 전 소년보사든 다른 어느 곳이든 아동문학꿈을 이룰수 있는 곳이면 다 되였습니다. 그런데 조남기동지의 말씀은 이러한 저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보도록 제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꿈과 민족후대양성사업간의 관계문제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머리속에 인식의 새로운 승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것이죠. 그때로부터 저는 저의 모든것을 미련없이 청소년사업에 바칠수 있었지요. 저는 청소년들을 위해 신문도 꾸리고 아동문학도 하고 사회활동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을 위한 일이라면 그 무슨 일이든 뛰여들었지요.》 한석윤선생의 감회 깊은 말씀이다.

소년보사에 전근해온후에도 연변주당위의 책임자들은 1984년, 1987년에 그를 다른 요직에 승진시키려고 여러번 건의했으나 이미 우리 민족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에 한생을 바치려고 결심한 한선생은 모두 완곡하게 거절해버렸다.

소년아동신문사업에 대한 획기적인 기여

《문화대혁명》기간 페간당했다가 회복된지 얼마 안된 《연변소년보》는 당시 연변지역 조선족소년아동만을 대상하는 지방신문이라 변변한 사무청사 하나 없었다. 직원 주택은커녕 취재에 필요한 사진기 한대도 없는 형편이였다.

 

중국소년아동신문잡지사업일군협회 회장단(1999년)

신문사의 면모부터 개변하기 위해 한석윤선생은 출근 첫날부터 련이어 성정부, 주정부 해당 부문에 정황을 반영하면서 신문출판에 필요한 설비와 기자재들을 마련했고 사무청사며 직원들의 주택문제도 해결했나갔다.

한선생은 1985년 1월에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였던 호요방동지, 공청단중앙 서기처 서기였던 호금도동지의 지지를 쟁취하여 지방급신문이던 《연변소년보》를 전국급 《중국조선족소년보》로 승격시키는 쾌거를 이룩해내였다.

그해 5월부터 제1책임자의 중임을 떠멘 한석윤선생은 전체 임직원들을 이끌고 《중국조선족소년보》를 드디여 전국 300여개 소년아동신문잡지가운데서 골간간행물의 하나로 부상시켰고 발행량 7만부를 돌파하는 기록을 창조하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였다. 당시 매 3명의 조선족어린이중 1명이 《중국조선족소년보》를 주문해 독자대상당 평균 발행량이 전국 신문간행물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선생은 조선족후대들을 21세기의 창조형인재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중국조선족소년보》가 조선족소년아동들의 《여론중심, 문화행사중심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신문을 잘 꾸리는외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조직하는데 큰 공력을 들였다.

그는 우리 말, 우리 글을 빛내여가기 위해 《그림 보고 글짓기》행사를 11차 조직하여 많은 문학신동들을 양성하였다. 새세기 수요에 적응되는 창조형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소발명, 소론문 경연대회》행사를 발기하고 행사를 12차 조직하였다. 소년아동들에게 시대적전형을 수립해주기 위해 《조선족 10대 최우수소년 선발표창대회》를 발기하고 행사를 10차 조직했으며 《신동컵수학경연대회》를 발기하고 조직하여 한국에서 펼쳐지는 국제수학대회에 조선족수학신동들을 11차 출전시켰다. 소년아동들의 가슴속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 《사랑의 일기 쓰기》공모전을 발기하고 행사를 10차 조직하였으며 《중국조선족장학금상》을 제정하고 매년 50명 ~ 60명씩 생활형편이 어려운 소학생, 중학생, 대학생들을 8차 지원하였다. 그외에도 《환경보호 과학환상 미술대회》, 《우수꼬마기자 선발표창대회》 등 여러가지 행사를 조직하여 조선족소년아동들에 대한 자질교육을 추진했다. 그리고 소년아동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편 민족교육사업에 모든것을 바쳐가는 교원들을 장려하기 위해 《고마운 스승님상》을, 학생들의 문화행사를 잘 이끌어주는 보도원선생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마운 보도원상》을, 아동문학가 양성을 위해 《백두아동문학상》을 설치하였다.

 《윤정석아동문학상》시상식에서(2010년)

피타는 노력으로 《중국조선족소년보》는 국가신문출판총서로부터 《우수신문》으로 평정받았고 전국소년아동신문간행물사업협회로부터 1류 신문의 표징인 《금상》을 받아안았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는 길림성인민정부로부터 《모범집단상》을, 공청단중앙으로부터 선후로 3차 표창받는 영예를 따내기도 하였다.

청소년사업이나 민족교육사업이라 하면 한선생은 무엇이든 발벗고 찾아나섰다. 례를 들면, 조선족소학교 도서실 책꽂이들이 비여있는것을 보고 그는 여러차례 출판사나 사회단체에 도움을 요청해 가치가 100여만원에 달하는 여러가지 아동도서들을 30여개 조선족소학교에 무료로 보내주었다.

소수민족으로는 제일 첫 사람으로 전국소년아동신문간행물협회 부회장 직무를 맡은 한선생은 적극적으로 소수민족소년아동신문잡지사들을 위해 곤난을 해결해주었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제때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반영하였다.

다년간 후대들에게 심혈을 기울인 그의 로고를 기리여 공청단중앙과 중국청소년신문잡지간행물협회는 2002년 6월 제1회로 그에게 중국소년아동신문출판계의 최고영예상인 《엽성도상》을 수여하였다.

중국조선족문단의 대표적인 동시작가

한석윤선생은 신문 꾸리기와 여러가지 조직행사에 분주히 보내면서도 항상 마음에 담고있는 일거리가 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문학창작이였다.

1971년에 동시 《홍소병은 달린다》를 《홍소병》잡지에 발표한외 문학창작에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있었다. 신문사의 난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된 1987년부터 한선생은 낮이면 신문출판과 여러가지 행사들을 위해 뛰여다니고 밤이면 동시 연구와 창작에 몰두했다.

당시 한선생네 집식구들은 70고개를 넘은 로모에 딸 둘, 아들 하나 여섯식구가 2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두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저녁식사후 두리상이라도 놓고 글을 쓸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부엌널마루였다. 매일 밤 널마루우에서 행복감에 푹 잠긴채 선생은 시간 가는줄 모르고 동시세계에 깊이 빠져있군 했다.

1996년-2013년 한국에서 6차《한석윤초청동시화전》개최

사진은 2006년 서울에서 펼쳐진 한석윤초청서화전 기념촬영장면

그는 중국조선족 동시창작의 현상태를 분석검토하는 한편 중외의 동시연구를 선행하면서 새로운 동시탐구에 심혈을 몰부으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선생은 동시창작에서 혁신의 앞장에 섰고 자신의 창작실천으로 중국조선족동시문학창작의 새 지평을 열어놓았다. 그는 《동시는 우선 시로 되여야 한다》, 《동시는 시적이미지로 창조되여 로소가 함께 읽는 시가 되여야 한다》는 문학신조를 내세우고 동시에서의 시적이미지 창조에 힘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시에서 시적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주장은 황당하고 불가능한것으로 치부되여 반대도 적지 않았지만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으로 증명해나갔다. 동시에 대한 선생의 탐구적노력은 동시의 형식, 내용, 창작방법 등 여러 면에서 표현된다. 선생은 동시단의 선두주자로, 거목으로 급부상했고 그의 동시창작은 당대 중국조선족동시창작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선생의 동시는 시종 우리 민족 후대들에 대한 진지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있으며 동시를 언제나 지성인의 높은 자각과 책임감, 사명감으로 써내려갔다. 그의 동시 작품들은 《중국조선족소년보》와 《별나라》 등 신문잡지를 통해 륙속 발표되였으며 1990년대초부터는 《별과 꽃과 아이와》, 《외눈박이 가로등》, 《작아지는 지구》, 《웃음을 쏘는 대포》, 《열매를 단 경아라는 나무》, 《내가 만약 노벨상을 만든다면》 등 11권의 동시집으로 출판되여 풍만한 성과를 과시하였다. 선생의 동시집들은 실로 우리 민족의 아름답고도 소중한 아동교양서라고 할수 있다.

한선생은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늦깎이로 동시창작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짧은 기간에 제일 알쭌한 작품을 제일 많이 창작해내고있다고 평가를 받은 선생은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학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한국계몽아동문학상》, 《한국방정환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등 작가들이 부러워하는 묵직한 문학상을 10여차 수상하였다.

1996년, 2006년, 2013년에는 한국청소년운동련합의 초청과 한국문화관광부 교육인적자원부 국가청소년위원회의 후원으로 한국의 서울, 대전 등지에서 《한석윤초청동시화전》도 성공적으로 가졌다. 2006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아동문학대회와 아시아아동문학대회 기간 한나라에 2명씩밖에 배정하지 않는 대회사회자에 뽑혀 사회를 진행했고 영국,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아동문학인 20명과 함께 방정환묘소도 참배하면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가의 위상을 높였다.

정년퇴직후에도 청소년사업은 여전히 그의 천직

뒤산 벼랑턱에

연분홍진달래 걸어보았다가

후미진 길가에

노오란 개나리 달아보았다가

다시 마을뒤 과수원에

하얀 배꽃 피워놓고

그우에 알쏭달쏭

춤 고운 나비떼 풀어보지만

 

성차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

산과 들을

온통

초록으로 칠해버리는 5월

 

청방울소리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지구의 맥박도

한결 힘차게 뛰는

싱싱한 6월을 위하여

다심한 5월은

온 한달 부산만 떤다

한석윤선생의 동시 《6월을 위하여 5월은》의 전문이다.

선생은 언제나 《6월》을 위하는 《5월》로 되고저 한다. 《6월》로 상징되는 후대들은 민족과 나라의 미래이기에 그는 후대들을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야 한다고 피력하며 바로 거기에 삶의 의의와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제2차 세계아동문학대회에 참가(2006년 한국 서울)

2003년에 정년퇴직한후에도 조선족청소년사업을 위해 부지런히 뛰고싶었던 한선생은 개인 돈 4만원을 기초로 《연변조선족자치주청소년문화진흥회》를 발족시키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청소년들에게 사랑을 주고 문화를 준다는 취지로 세운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는 원 주인대 상무위원회 주임 오장숙동지를 비롯한 국내국제 지인들과 교원, 청소년사업가, 문인들의 지지하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템포가 빠르게 수많은 일들을 해냈다.

어려움속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초록장학상》(14차 장학금을 전달), 아동문인들이 청소년을 위해 훌륭한 아동문학작품을 쓰도록 격려하기 위해 《윤정석아동문학상》을 설립하였다. 조선족청소년들속에서 독서열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변조선족독서사와 손잡고 《엄마랑 함께 하는 독후감쓰기대회》를 발기하고 행사를 5차 조직했으며 또 사랑의 동시가 어린이들 가슴속에 와닿도록 하기 위해 《엄마랑 함께 하는 동시랑송대회》를 발기하고 행사를 2차 조직하였다. 그리고《독서왕, 독서모범가정, 독서모범학교 표창대회》등 행사도 조직하였다.

한국, 조선 출판사와 련계하고 자금을 인입하여 한국, 조선, 중국에서 20여권의 아동문학작품집을 출판하였다. 청소년을 위한 우리 민족 위인전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등을 편집, 출판하여 전국 각지 조선족 중, 소학교에 무료로 보내주었다. 한중시화전, 동시화전, 국제청소년시화전, 어린이시화전 등을 20여차 조직하였다.

조선족 아동문학가들의 업적을 기리고 자라나는 세 세대들에게 민족문화를 전하기 위해 연길시공원에 《동시동네》를 마련하고 동시비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6개의 동시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독서사와 함께 《꿈나무》신문을 꾸리고 청소년을 위한 각종 문화사업에 성금을 지원하는 등을 비롯해 많은 일들을 해오고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0돐을 맞으면서 2012년 《9.3》전야에 연길시 진달래광장에 《자치주 성립 경축의 노래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20세기 50년대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을 다시 재현하였고 세세대대 전해갈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당의 민족정책에 감사드리고 자치주를 더욱 부강하게 건설해나아갈 뜻을 다지게 하였다.

《김례삼시비》제막식(2008년)

정부의 지원이 아니고 민간모금으로 70만원을 투자해 기념비를 세우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특히 한석윤회장의 노력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있다. 기념비건립발기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는 기념비의 건립과 자금마련을 위해 병약한 몸을 이끌고 밤낮이 따로 없이 동분서주했다. 그의 진한 애족애향심과 인격적인 매력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한석윤회장에겐 휴식일이나 명절이 따로 없다. 병원에 입원하는 시간과 출장시간을 내놓고는 매일 사무실에 나온다. 한번씩 행사를 진행할 때마다 사무실 쏘파에서 잠을 자고 누룽지를 풀어 식사하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마음만은 항상 즐겁다고 한다.

오늘날 조선족청소년들에 대한 교양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있고 큰 사회문제로 대두하고있다. 지금 조선족 중소학교 학생들중 결손가정학생수가 70%로 육박하고있고 따라서 사랑을 잃은 문제청소년들이 급증하고있다. 실로 《아이들을 구하라!》고 웨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더욱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때입니다. 제가 퇴직한후 아동문학협회나 동시연구회 같은것을 설립하지 않고 청소년문화진흥회를 설립한것도 바로 이런 원인에서입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자면 가정, 학교, 사회가 함께 손잡아야 하는데 사회방면에선 우리 같은 이런 사회단체가 앞장서야 히지요. 이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입니다. 》

우리 민족의 현실에 가장 먼저 안타까와하면서 청소년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주고 그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모든 심혈을 쏟고있는 한석윤회장은 실로 탁월한 공헌을 했고 거창한 일을 했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그가 이룩한 다양한 업적은 중국조선족청소년문화사에 눈부신 한페지로 기록될것이다. 후대를 위한 사업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생을 바쳐 후대사랑을 실천해가는 한석윤회장, 그는 실로 우리 민족 후대사랑의 대표적인 실천자이다!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전명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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